케로로 중사(ケロロ軍曹, 2004년)
평점 : ★★★★☆
여러 면에서 훌륭하고 기발하고 재치있고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이지만, 워낙 내용이 유치찬란하여 별 다섯은 다 못주겠고, 네 개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케로로 중사(ケロロ軍曹)는, 2004년부터 방영을 시작하여 2009년 5월 현재 260화가 넘게 방영되고 있는 초~ 장편 시리즈이다. 원작 만화는 요시자키 미네(吉崎観音)가 1999년부터 <월간 소년 에이스>에 연재하고 있다. 만화, 애니 모두 ‘현재 진행형’이다.
주인공이 지구침략군(두꺼비 대성운 58번 행성인 케론성의 지구침략군) 소속으로 선발 정탐부대가 되어 지구에 침공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지만, 군대는 단지 소재일 뿐이고 실제 내용은 일상생활을 다룬 시트콤이다. 내용 자체는 유치하고 말도 안 되는 것이지만, 상상을 초월하는 ‘개그’와 ‘패러디’가 있기 때문에 의외로 재미있다.
내용이 내용인지라(사실상 아무 내용 없음) ‘7세 이상 전체관람가’라는 등급이 매겨졌는데, 내 생각에 이 애니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최소한 중학생 이상은 되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꽤 어려운 용어가 많이 나오고, 거의 매회 패러디 장면이 나오기 때문이다. 패러디를 이해하기 위해선 원작이 되는 작품을 보았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한데, 초등학생들이 케로로 중사에서 광범위하게 인용하고 있는 원작들을 보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이 아닌 나라 사람들) 역시 케로로 중사를 제대로 이해하긴 어려워 보인다. 패러디를 보고 웃으려면 원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원작이 되는 작품을 모른 채 케로로 중사를 본다면, 그저 바보스런 행동으로 인한 ‘영구와 땡칠이’ 수준의 웃음밖에 느끼지 못할 것이다.
워낙 내용이 유치해서 단어/어휘력이 부족해도 보는 데 문제는 없지만, 의외로 어려운 말들을 많이 사용하는 상당히 고급스러운(?) 애니메이션이다. 우선 제목부터 꽤 어려운 말이 사용되고 있다.
케로로 중사(ケロロ軍曹)에서 ‘군소(軍曹, 군조)’라는 말은, 옛날 일본 육군의 하사관 계급의 하나이다. 지금 우리나라 계급 체계로 볼 때 ‘중사’에 해당한다. 기로로 하사, 타마마 이등병, 쿠루루 상사, 도로로 병장도 역시 옛날 일본 육군의 계급 분류 방식이다. 그런데 하고 많은 계급 중에 왜 하필 중사인지, ‘케로로 병장’도 아니고 ‘케로로 하사’도 아니고 왜 ‘케로로 중사’인지 의문을 가진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케로로의 계급이 중사인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군소(軍曹)를 직역하면 중사가 맞다. 하지만 뉘앙스가 조금 달라진다. 군소(軍曹)에는 ‘군기반장’이란 의미도 있다. 옛날 일본 육군에선 중사란 계급이 군기반장 역할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 군대는 상병이 군기반장 역할을 한다.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해야 하는 한국에선, 병장은 곧 집에 갈 생각에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므로 상병이 군기 잡는 역할을 담당한다.
내가 케로로 중사 이외에 중사(軍曹)라는 말을 들었던 애니는 ‘메이저 4기’이다. 주인공 ‘시게노 고로’가 미국으로 건너가 메이저 리그에 도전하는데, 3A 팀인 멤피스 배츠에 입단해서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는 내용이다. 멤피스 배츠에는 샌더스라는 포수가 있는데, 동료들이 그를 흔히 중사(軍曹)라고 부른다. 마이너리그 우승에 대한 집념이 남달리 강한 샌더스가 팀 내의 군기를 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따라서 케로로 중사(ケロロ軍曹)라는 말은 단순히 계급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군기반장 케로로’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5마리(?)의 우주인 개구리 중에서 가장 군기가 빠진 캐릭터가 케로로이다. 케로로 중사(ケロロ軍曹)라는 말은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케로로 중사’라는 한국 제목만 들어선 이런 아이러니를 느낄 수 없다. 그렇다고 ‘군기반장 케로로’, ‘케로로 상병’으로 번역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번역의 어려움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제목에 대한 설명만으로도 꽤 길어진 것 같은데, 패러디에 대한 설명은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워낙 많은 작품을 패러디하고 있어서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거의 매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은 ‘건담 시리즈’이다. 선라이즈(SUNRISE)가 제작해서 그런지, 주인공 케로로 중사의 취미가 아예 건담 프라모델 만들기이다. 케로로가 돈을 모으려는 이유도, 지구를 침략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라, 건프라(건담 프라모델)를 사기 위해서이다.
건담의 출격 장면, 등장 인물, 유명한 대사에 대한 패러디가 많이 나온다. 건담은 TV시리즈만 해도 12편이나 되기 때문에 꽤 광범위하게 패러디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기동전기 건담W에서 주인공 히로이 유이가 건담 윙과 함께 자폭하는 장면을 패러디한 적이 있는데, 만약 건담 Wing을 안 본 사람이라면 이 장면에 대한 재미가 반감될 것이다.
슬램덩크의 유명한 대사 ‘왼손은 거들 뿐(左手は添えるだけ)’이란 대사, 드래곤볼의 겡끼다마(元気玉, 원기옥)를 패러디한 타마마 이등병의 싯토다마(嫉妬玉, 질투옥)도 기억에 남는다^^; 그나마 슬램덩크와 드래곤볼은 유명한 작품이라서 나도 잘 알고 있지만, 아마 내가 모르는 패러디도 꽤 많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안데르센의 동화 ‘성냥팔이 소녀’를 패러디한 적도 있었고, 일본의 옛날 이야기를 인용한 장면도 있었다.
원래 이런 유치한 내용의 애니메이션은 잘 안 보는데, 상상을 초월하는 패러디가 있어서 꾸준히 보고 있다. 하지만 워낙 내용이 유치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애니를 너무 많이 보면 머리가 텅텅 비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해야 한다. 물론 나는 자막 없이 일본어 대사를 이해하며 보려고 해서, 머리가 아프지만...
▲▼이런 단어들이 그냥 휙휙 지나간다. 그냥 정지화면으로 보면 이해하기 어렵지 않지만, 빠르게 지나가는 장면 속에서 이해하기는, 일본어 공부를 왠만큼 많이 한 사람이 아니면 꽤 어렵다.
▲타마마 이등병(왼쪽)의 가슴과 머리에 있는 저 마크는 <와카바 마크(若葉マーク)>로 ‘초보운전’이란 뜻이다. 일본에선 초보운전자가 자동차에 저런 마크를 6개월~1년 정도 붙이고 다닌다.
이등병과 초보운전... 꽤 잘 어울리는 것 같다. 하지만 저 마크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겐 무의미한 표시일 뿐이다. 같은 이유로 패러디의 원작을 알고 ‘케로로 중사’를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쯤 되면 ‘간접광고’가 아니라 ‘직접광고’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거의 매회 건담이 등장한다. 뭔가에 걸려 넘어져도 꼭 건담이다. 케로로 중사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건프라를 사고 싶어하는 기분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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