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선거는 왜 안 되는 것일까?
선거 때만 되면 들려오는 진부한 얘기 중 ‘정책선거가 실종됐다’는 것이 있다. 이번 18대 국회의원 선거도 아니나 다를까 정책선거와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인다. 대통령 선거가 있은 직후에 각 당이 총선 준비를 제대로 못해 후보자 선정이 늦어졌기 때문이란 얘기도 있지만 이유가 되지 않는다. 과거의 총선도 정책선거였다고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왜 정책선거가 안 되는 것일까? 혹시 정책선거는 원래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우린 불가능한 것을 이루려는 헛된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이 모든 책임을 정치인들에게 돌리면 얘기는 쉬워지지만, 정책선거가 안 되는 책임이 전부 정치인에게 있다고 볼 수도 없다. 정치인이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만든 정치인이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총선(국회의원 선거)과 지방자치단체장/지방의회 선거는 다르다는 점이다. 유권자도 그렇고 후보자도 그렇고 이게 총선인지 지방선거인지 구분을 못 할 때가 많다. 지역구에 다리 놓아 주고 도로 건설하는 것은 지방선거의 영역이지 국회의원이 할 일이 아니다. 물론 국회의원이 지역발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런 ‘지역발전 공헌도’에 따라서 국회의원이 평가되고 당선되면 곤란하다. 국회의원은 입법활동, 즉 좋은 법률을 제정하는데 얼마나 노력했는가, 국가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데 얼마나 공헌했는가에 따라서 평가되어야 한다. 우리 동네에 도로 건설해 줄 사람 뽑는 게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란 점을 기억하자. 그런 건 단체장이나 지방의원들에게 호소하면 된다.
바로 여기에 국회의원 선거의 딜레마가 있다. 이런 거시적인 정책활동은 지역 주민들의 이익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약하며, 심지어 상충되기도 한다. 따라서 아무리 입법활동 잘 했다고 말해봐야 주민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우며 당선/재선되는데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좋은 법률을 만드는 것보단 지역구에 좋은 건물을 짓는 게 당선에 유리하다.
결국 문제 해결의 열쇠는 올바른 정당정치로 가는 데 있다. 각 정당들이 자신들의 이념에 맞는 공약을 발표하고, 후보자는 그런 공약을 지역구로 들고 가서 토론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개인별로 선거에 임박해서 공약을 급하게 만들어서는, 공약의 수준이 현저히 떨어지며 그 내용 또한 ‘지역발전 공헌’ 수준을 넘어서기 힘들다. 물론 후보자들이 자기 정당의 공약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이것저것 좋다는 건 다 집어넣는 식이라서 핵심을 파악하기 힘들다.
아울러 후보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정책선거는 멀어진다. 지금처럼 개나 소나 다 출마해서 후보자가 난립하면 사람을 기억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정책이나 공약을 기억하기는 더더욱 힘들어 진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은 사실상 필요가 없다. 선거를 앞두고 급하게 만들어진 정당도 할 수 있는 일이 사실상 없다. 지방선거라면 무소속이 당선되어도 개인 역량에 따라서 훌륭하게 일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국회활동은 어디까지나 정당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 무소속이나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정당의 후보자가 당선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혹자는 선거법이 무소속이나 군소정당 후보자들에게 불리하다고 말한다. 물론 선거법에 불합리한 점이 있다면 고쳐야겠지만, 무소속/군소정당에 유리하게 바꿀 필요성도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누구나 선거에 출마할 권리가 있지만, 정치인이 되고자 하는 자에게는 책임 또한 있어야 한다. 훌륭한 공약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그간 남다른 노력으로 지역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한 것도 아니고, 이도저도 아니라면 최소한 지역구에서 인지도라도 높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아닌 사람이, 정당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력으로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선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당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나 단체가 선거를 통해서 자신들의 이름을 알리려는 행위까지 존중해 줄 필요는 없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자기 지역 후보자의 공약이 뭔지 모르며 관심도 없다. 사실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다. 그 후보자가 당선된다한들, 선거를 앞두고 급조된 공약이 제대로 지켜질 가능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유권자들이 정책이나 공약에 관심을 가지려면 대결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이렇게 되려면 국회의원 선거는 개인 대 개인의 대결이 아니라, 정당 대 정당의 대결구도가 되어야 한다. 후보자는 어디까지나 각 지역구에서 정당의 대리인 역할을 해야 한다.
정리하면 총선이 정책선거가 되려면, 공약을 후보자 개인별로 만들어선 안 되고 정당별로 만들어서, 후보자는 자기 정당의 공약을 지역구로 갖고 가서 토론해야 한다. 지역구에서 정말로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면 무소속이나 군소정당 출마자에 대한 배려는 필요 없다.(그렇게 훌륭한 사람이라면 기존 정당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경쟁을 할 것이므로, 사실상 무소속 출마자는 철저히 무시하는 게 좋다.) 출마 자체에 의의를 두는 후보들까지 배려한다면 논점만 흐려질 뿐 정책선거가 멀어진다.
TV 토론회도 이런 잡다구레한(!) 후보자들까지 모두 초청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렇게 하면 당선가능성이 있는 후보자는 토론회에 나오지 않으려고 하며(어차피 효과도 없는 토론회에 나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그 시간에 다른 선거운동을 하는 게 효과적이므로), 유권자의 알권리는 더욱 멀어진다. 후보자가 많으면 제대로 된 토론이 되질 않으며, 따라서 재미가 없고, 결국 유권자들이 잘 안 본다. 당선가능성이 있는 2~3명의 후보자가 핵심쟁점을 갖고 깊이 있게 토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런 토론회라야 어떤 놈이 무식한 놈인지 가려낼 수 있다. 지금처럼 많은 후보자가 떼거지로 출연해서 대충 몇 마디 하다 끝나는 토론회로는 후보자에 대한 검증이 어렵다.
마지막으로 유권자들도 총선과 지방선거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국회의원 선거는 중앙정치인을 뽑는 것이지 지방정치인을 뽑는 게 아니다. 누가 우리 동네를 발전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지방선거 때 하기 바라며, 총선 때에는 누가 대한민국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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