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일상다반

일본의 외국어(영어) 발음은 엉터리일까?!

페이퍼컴퍼니 2009. 8. 13. 23:05

한국은 방송에서도, 글을 쓸 때도 가급적 외국어 사용을 지양할 것을 권장한다. 우리말로 표현하기 힘들거나 어려운 경우가 아니면 외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것을 기본원칙으로 하고 있다. 방송용어나 간판 등에 외국어가 무분별하게 남발되고 있어 문제라는 뉴스도 종종 나온다.

 

(※외국어와 외래어는 엄연히 다르지만 여기선 구분하지 않겠음)

 

나도 이런 우리말 사용 원칙에 기본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물론 컴퓨터를 ‘셈틀’, 네티즌을 ‘누리꾼’이라고 하는 것은 좀 어색하기 때문에 그냥 외래어를 사용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분별한 외래어/외국어 사용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반면 일본은 외래어 사용에 특별히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우리 입장에서 볼 땐 정말로 무분별하게 외래어가 남발되고 있다. 엄연히 일본어 표현이 있는 것조차 외래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저런 것까지 외래어를 사용해야 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일본어의 표준이라 할 수 있는 NHK 방송조차 외래어 사용에 특별히 거부감을 갖지 않는 것 같다. 외래어는 가타카나로 적는데, 가타카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일본어로 글 한줄 적기가 힘들 정도이다.

 

일본의 외래어 표기는 우리말과 비슷한 경우도 있지만,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전혀 짐작이 안 가는 말들도 무척 많다. 그리고 비슷한 경우는, 일본식 발음의 영향으로 오히려 우리말을 틀리게 적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우선 비슷한 말들 몇 가지...

 

report
  [일본어] 레포토(レポート)
  [한국어] 리포트(O) / 레포트(X)

 

message
  [일본어] 멧세지(メッセージ)
  [한국어] 메시지(O) / 메세지(X)

 

barbecue
  [일본어] 바베큐(バーベキュー)
  [한국어] 바비큐(O) / 바베큐(X)

 

Valentine Day
  [일본어] 바렌타인데이(バレンタインデー)
  [한국어] 밸런타인데이(O) / 발렌타인데이(X), 바렌타인데이(X)

 

위의 말들은 일본어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들어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말들도 많다.

 

marathon
  [일본어] 마라송(マラソン)
  [한국어] 마라톤
=> 이 단어는 일본어 교육 초급과정에 나오는데, 처음 들었을 때 무척 신선한(?) 느낌이었다. ‘마라송? 마라송이 뭐야?’라고 무척 의아해했던 기억이 난다^^;

 

panel
  [일본어] 파네르(パネル)
  [한국어] 패널
=> 연세 좀 드신 분들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영향이 남아서 ‘판네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공사판에서도 ‘판네르’ 혹은 ‘빠네루’라고 한다. 나는 ‘판네르’와 ‘패널’이 같은 말이란 사실을 일본어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다^^;

 

channel
  [일본어] 찬네르(チャンネル)
  [한국어] 채널
=> 공사판에서 사용하는 철제 빔 중에 ‘찬네르’라고 부르는 게 있는데, 일본말의 잔재로 ‘채널’이 맞다.

 

tunnel
  [일본어] 톤네르(トンネル)
  [한국어] 터널

 

mannerism
  [일본어] 만네리즈무(マンネリズム) / 보통 줄여서 만네리(マンネリ)라고 함
  [한국어] 매너리즘

 

dilemma
  [일본어] 지렘마(ジレンマ)
  [한국어] 딜레마

 

handsome
  [일본어] 한사무(ハンサム)
  [한국어] 핸섬

 

이렇듯 우리말 감각으론 전혀 짐작이 안 가는 외래어가 많기 때문에, 일본어 공부 초기에는 외래어의 가타카나 표기법도 한자나 문법 공부만큼 중요하다. 우리식으로 적으면 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로 외워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어떤 외래어 단어를 보았을 때 가타카나로 어떻게 적는지 감이 잡히지만, 그런 감을 익히기 전까지는 무조건 외우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학교 수업 중에 일본의 외래어 발음을 무시하는 행동을 보이는 한국 학생들을 꽤 많이 보았다. 선생님이 가타카나 발음을 하면 자꾸 한국식 발음을 강조하는 학생들이 있다. 물론 농담으로 그럴 때도 있지만, 정말로 한국식 외래어 발음이 옳다고(일본보다 우리식 발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말의 발음이 일본보다 종류가 많고, 또 한글이 히라가나/가타카나보다 과학적이어서 표현할 수 있는 발음이 많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나는 우리나라 언어와 한글이 세계 어느 나라의 그것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다. 하지만 외래어 표기는 발음의 정확도로 결정되는 게 아니다.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발음과 문자가 다르기 때문에, 외래어를 100% 정확하게 자국어로 표현할 순 없다.

 

우리나라나 일본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나라도, 외래어를 자국 언어로 표현할 때는 원래 발음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본어의 외래어 발음을 깔보는 한국 학생들을 무척 많이 보았다. F의 일본어 발음은 ‘에후’이다. 선생님이 ‘에후’라고 하면 ‘에프’라고 박박 우기는 한국학생들이 꽤 있다. F의 발음이 정말로 ‘에프’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이런 사람들은 십중팔구 Z를 일본식 발음인 ‘제트’라고 읽을 것이다. Z는 유성음 ‘지~’, G는 ‘쥐~’라고 하는 게 비교적 원래 발음에 가깝다. marathon의 일본어 발음은 ‘마라송’이다. 역시 ‘마라톤’이 맞다고 우기는 학생들이 있다. 정말로 marathon의 발음은 ‘마라톤’일까? 정확하게 적을 순 없지만 marathon의 발음은 ‘매러쏜’에 가깝다. 따라서 ‘마라톤’이 ‘마라송’보다 더 정확한 발음이라고 하기 힘들다.

 

또한 언어는, 언어 자체의 과학성과 합리성만으로 우열이 결정되는 게 아니다. 영어가 전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언어라서 세계 공통어가 된 게 아니다. 언어 속에 녹아 있는 역사와 전통도 무척 중요한 요소이다. 일본어 역시 언어 자체의 능력(표현할 수 있는 발음 수나 구조)은 한국어와 한글보다 떨어지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문화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만화나 애니, 노래가 좋아서, 혹은 일본의 산업/과학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일본어를 배운다. 일본어가 우리말보다 뒤떨어진 언어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렇담 일본보다 뛰어난 언어를 가진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선진국이 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따라서 우리말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무척 좋은 일이지만, 우리말을 기준으로 남의 나라 언어를 깔보는 행동은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말도 제대로 몰라 엉터리로 쓰는 사람들이 결국 남의 나라 언어를 업신여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비슷한 원리로 우리 역사도 모르는 사람들이, 꼭 일본에서 뭔 일만 생기면 구태의연한 반일감정 전파에 앞장서고...

 

일본어를 배우면서 우리말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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