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마리아가 동정녀이냐 아니냐는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당연히 동정녀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정녀가 아니란 사실은 마리아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일도 아니고, 종교에 대한 모독도 아니다. 오히려 SEX 없이 아이를 임신하여 낳는 것이 비정상적이고 기괴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만약 중세시대에 SEX 없이 임신했다는 소문이 퍼졌으면, 그 여자는 마녀라며 화형에 처해졌을 지도 모른다. ‘기묘한 일’이 권력자의 마음에 들면, 성스러운 것이 되고, 마음에 안 들면 악마의 소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마리아가 동정녀였고, 동정녀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성(性)스러운 것은 성(聖)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는 그들만의 독특한 사고방식이다.
마태복음 1장은 예수의 족보에 대해서 아주 길게 나열하고 있다.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 주~우욱 나열되어 있는데, 결국 결론은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직계 자손이란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지 않는가?
마리아가 동정녀로(아버지의 정자 없이) 예수를 낳았다는데, 어떻게 예수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직계 자손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마리아가 동정녀이고, 예수는 하나님의 직계자손이다 라고 하면 그나마 ‘억지로라도’ 이해를 하겠는데, 그런 얘기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왕의 혈통이 예수에게로 이어졌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다.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당시의 시대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 로마의 핍박을 받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엄밀히 말하면 이스라엘인과 유대인은 다르지만 그냥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다윗왕과 같은 메시아가 다시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해 줄 것이란 믿음이 퍼져있었다. 즉, 메시아는 다윗의 자손이고, 다윗의 고향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란 예언을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믿고 있었다. 그들의 이런 심정을 이해 못한 건 없다. 우리도 만약 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는다면 이순신 장군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일본을 물리쳐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생길 것이다.
물론 예수는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도 사실상 없다. 어지러운 시대에는 늘 그러하듯이, 당시 이스라엘에도 ‘자칭’ 메시아들이 많이 나타났다. 스스로를 다윗의 자손이며 메시아라고 칭하는 사이비 종교지도자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다윗이 돌팔매로 골리앗을 물리쳤듯이, 자신이 로마제국을 물리칠 수 있다는 허황된 이야기를 하는 사이비들이 많았던 시대였다.
(참고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와 ‘메시아’는 같은 뜻이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의 히브리어이고, ‘그리스도’는 그 말을 번역한 희랍어이다. 따라서 그리스도Christ란 말은 당시 널리 사용되던 일반명사였고, 자기가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 즉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이비들이 많았다.)
오히려 예수는 이런 사이비들을 비판하며 좀 더 현실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그 옛날 다윗과 같은 방식으론 로마제국을 물리칠 수 없다는 점을 인식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정신을 새롭게 하는 것부터 예수는 시작하려고 하였다. 예수가 여타의 사이비 종교지도자들과 달리 위대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최소한 예수는, 자신이 돌팔매질 한 번으로 로마제국을 물리쳐서 백성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는 뻥을 치고 다니진 않았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요즘 사람들은 그런 예수의 말씀은 버리고, 예수가 비판했던 사이비들의 말을 더 좋아하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마음은 비슷한가 보다. 요즘 경제가 어렵다니까 로또라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은 것처럼, 당시에도 메시아가 짜짠~ 하고 나타나서 세상을 구원해주는 기적과 같은 일을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태복음의 저자도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물론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도 비슷한 고민을 갖고 있었다) 예수의 위대함을 사람들에게 알리긴 알려야 할텐데... 어떻게 이야기를 구성해야 사람들에게 먹혀 들 것인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이듯이, 아무리 예수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어도, 예수의 위대한 말씀과 행동이 사람들에게 널리 전파되지 않으면 말짱 꽝 아니겠는가?
복음서의 저자들은 현실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스토리로 예수의 삶을 재구성하였던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가 다윗왕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예수도 그러한 사람으로 스토리를 짜야 했다. 하지만 예수는 다윗의 자손도 아니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다. 당시 베들레헴은 대도시였고, 예수는 나사렛 촌놈이었다. 요즘 사람들도, 깡촌보단 대도시 번화가를 누비며 활약하는 멋진 남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좋아하듯이, 당시 사람들도 비슷했다. 나사렛 촌놈을 주인공으로 삼아선 ‘시청률’을 올리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예수의 삶을 완전히 왜곡시켜서 거짓말을 할 순 없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해결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신화적인 장치가 사용된 것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거짓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어차피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이야기나 기적, 이적은 이런 차원에서 이해를 해야 한다. 마리아를 동정녀로 설정하면,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난 것으로 하면, 예수의 출생지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어찌되었건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이 되므로...
성경에 있는 이야기를 100% 진실이라고 믿는 건 뭐 개인의 자유이지만, 믿을 때 믿더라도 당시의 역사적, 지리적 상황을 이해하면서 믿어야 한다. 특히, 성경은 그 무대가 사막지방이기 때문에, 사막이 아닌 곳에서 사는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점이 많다.
예를 들어 흔히 목자(牧者)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는데(예수는 나의 목자이시니... 어쩌구 저쩌구...), 이게 뭔지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예수가 어린 양을 돌보는 그림이 그려진 달력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과연 그 장면은 진실일까? 알프스 소녀 하이디에서 나오는 목동과 예수가 살았던 사막의 목동은 다른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지 예수가 어린 양과 함께 있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알프스 산맥을 떠올리고 있다. 그것도 날씨가 아주 좋을 때의 장면으로... 그리고 목자(양치기)가 양을 돌보는 이유가 뭐겠는가? 결국 나중에 잡아먹으려고 돌보는 거 아니겠는가^^; 이스라엘의 축제에서 양고기는 꼭 있어야 할 음식이다.
시대도 다르고, 지리적 환경도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공부가 필요하다. 우선 당시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또 사막이란 지리적 특성에 대해서도 공부가 필요하다. 그런 것 없이 성경을 읽으면 말 그대로 사이비 종교가 되는 것이다.
아울러 성경에 있는 신화적 구성이나 기적 등도 곧이곧대로 믿으면 곤란하다. 성경(복음서)의 저자들이 왜 이런 허구적 상황을 설정하면서 예수의 삶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면서 읽어야지, 신화 자체를 진실로 착각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대단히 안타깝게도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고뇌에 찬 말씀보단, 그저 기적이나 신기한 현상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하는 우화를 읽을 때, 대개 사람들은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한다...라는 교훈을 얻지, 정말로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했었다고 믿진 않는다. 이것이 현명한 사람들이 책을 읽는 방식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성경을 읽을 때는 그런 총명함이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
지금도 기적을 바라며, 부귀영화를 바라며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정말로 예수님의 뜻을 거스르는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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