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모순 : 윤회(輪廻) vs. 해탈(解脫)
우리나라에서 종교 논쟁은 흔히 기독교, 좀 더 범위를 좁히면 개신교와 관련해서 나타난다. 개신교가 그만큼 억지논리를 펼치며 여기저기 쑤시고 다니기 때문에 반대세력도 많이 만든 것 같다. 하지만 아쉽게도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개신교와 관련한 논쟁들은 별로 유익해 보이지 않는다. 논쟁이라기 보단 상호비방전에 가까워 보여 안타깝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논쟁이 개신교에 집중된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비록 그 겉모양은 다를지언정 기본 원리가 비슷하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도 비슷하다. 천주교와 불교, 이슬람 그리고 여러 다른 종교에 대한 비판 정신도 중요하다. 특정 종교에 비판의 화살을 너무 많이 날리면 다른 종교는 괜찮은 것으로 착각할 가능성이 있다.
서구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제공한 정보 때문에 중동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잘못됐다는 반성의 목소리가 있다. 일면 타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슬람이란 종교가 미화되거나, 중동의 독재 정권이 저지른 잘못을 다른 곳으로 전가시키는 생각도 문제가 있다. 이슬람교의 문제점은 기독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서구 기독교에 대한 반감으로 이슬람을 좋게 보려는 것은, 10명 죽인 살인자 때문에 9명 죽인 살인자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슬람의 영향력은 없는 것과 같으므로 이쯤에서 넘어가고, 기독교와 더불어 한국 종교의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불교에 대해서 좀 살펴보자.
불교는 기독교와 달리 절대신, 유일신의 개념이 없다. 전세계의 영향력 있는 종교 중에서 신이 등장하지 않는 거의 유일한 종교이다. 하지만 신(神)이란 말을 직접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불교에 신이 없는 건 아니다. 신에 버금가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아주 많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선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처’라고 하고,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도 여러 부처 중 한 명으로 여긴다.(원시불교에서 부처는 석가모니 한 명 뿐이었지만 이후 변화가 많이 생겼다.) 그런데 이 부처란 개념도 잘 뜯어보면 결국 신의 개념일 뿐이다. 기독교, 이슬람교와 다른 점은 그 신의 숫자가 하나가 아니라(유일신이 아니라) 여럿이란 점만 다를 뿐이다.
최근 언론에 많이 등장하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사실상 신에 버금가는 개념을 이용하고 있다. 티베트불교는 인도의 윤회사상과 티베트인의 살아 있는 신의 관념을 합하여 ‘달라이 라마’란 존재를 탄생시킨다. 덕망 높은 승려가 죽으면 그를 보살의 화신이었다고 간주하고 그는 사실상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전생(轉生)하여 구제활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믿는다.
고승이 죽음에 임해서 전생의 방향을 유언하면, 고승이 죽은지 10개월이 지난 뒤 49일 사이에 그 지방에서 태어난 어린이 중에서 활불(活佛)을 선정한다. 쉽게 말해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그 지방 어린이 몸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다. 이런 멍청한 생각을 바탕으로 티베트는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를 선정하고 있으며, 그게 바로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달라이 라마’라는 사람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어린이의 몸을 빌려 환생한다는 점이다. 판단력도 약하고 빽(!)도 없는 어린이가 지도자 역할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즉, 그 어린이를 둘러싼 주변의 어른들이 권력을 휘두르는 셈이다. 실제로 티베트 역사에서 ‘달라이 라마’가 환생했다는 그 어린이가 무사히 성인이 된 사례는 많지 않다.
이런 전생 개념은 티베트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도 존재한다. 흔히 농담반 진담반으로 전생체험이라든가,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뭐뭐로 태어나고 싶다라든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다행스럽게 우리나라는 전생을 파악해서 지도자를 뽑진 않는다. 그러나 컬트문화와 절묘하게 결합하여 전생 개념이 일반인들 사이에 많이 뿌리 내린 것 또한 사실이다. TV에서 전생체험 얘기가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불교에서의 윤회(輪回)는 생명이 있는 것, 즉 중생은 죽어도 다시 태어나 생이 반복된다는 사상이다. 엄밀한 의미에선 조금 다르지만 전생(轉生), 환생(還生)과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불교를 믿던 안 믿던 이런 전생 개념은 일반인들이 즐겨 사용한다. 또한 다른 종교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많이 나타난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윤회사상이 불교의 또 다른 핵심사상인 ‘해탈(解脫)’과 모순된다는 점이다. 해탈이란, 불교에서 인간의 속세적인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는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인간이 근본적 아집(我執)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말은 어려운데, 인간이 모든 번뇌와 과거의 업(業)을 벗어버리고 무(無)의 상태가 되는 것을 해탈이라고 생각하자. 록그룹 이름으로 더 유명한 너바나(Nirvana)는 불교용어 ‘열반(涅槃)’을 뜻한다. 해탈의 최고 경지를 열반이라고 한다.
이미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불교사상의 두 가지 핵심인 윤회와 해탈이 어째서 양립할 수 없는지 정리를 해보자.
윤회 :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구르는 것과 같이, 중생이 생사(生死)를 그치지 않고 계속 돌고 도는 일
해탈 : 중생이 과거의 모든 아집과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 완전히 해방되는 상태, 즉 종교와 인생의 궁극의 목적, 일체의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
즉, 한번 ‘해탈’을 하면 아무런 속박이 없는 궁극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다시 ‘윤회’할 수가 없다. 과거의 삶(前生)에서 뭐라도 하나 건질 게 있어야 윤회할 것 아닌가! 그리고 끊임없이 돌고 도는 중생은 해탈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돌고 도는 인생에는, 해탈과 같은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는 궁극의 최종 목적지가 존재할 수 없다.
스님들도 아주 오래전부터 이 두 가지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 문제 때문에 많은 논쟁이 생겼고 파벌이 나뉘어지기도 했지만 딱히 이거다 할 정도의 해결책은 내놓지 않고 있다. 둘 중 하나를 버리면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만, 스님들 입장에선 어느 것 하나 버리기가 아까운 것이다. 스님들이 이렇게 집착이 강해서야 어디 해탈할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물론 더 쉬운 방법은 두 가지 모두 버리는 것이다.
'무신론자(無神論者)' 카테고리의 다른 글
테레사 수녀는 성인인가 상인인가 (0) | 2014.07.12 |
---|---|
동정녀 마리아 신화의 탄생 배경은... (0) | 2008.12.24 |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0) | 2008.02.19 |
오컴의 면도날(Ockham's Razor) (0) | 2008.02.19 |
전지전능한 신 = 논리적 모순 (0) | 2007.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