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즈음에, 서점은 물론이고 학교 앞 문구점에서도 매달 하는 월례행사(?)가 하나 있었다. 바로 이런 문구를 가게 앞에 써붙이는 일이었다.
“드래곤볼 OO권 발행”
“슬램덩크 OO권 발행”
당시 드래곤볼과 슬랭덩크의 인기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고, 나 역시 이 만화를 읽는 재미로, 정말로 재미없었던 학교생활을 근근이 버틸 수 있었다.
드래곤볼과 슬램덩크가 우리 청소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시기가 일본에서도 ‘만화왕국’의 최전성기였다. 둘 다 슈에이샤(集英社)의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되던 만화였는데, 1995년은 ‘소년 점프’가 가장 높은 판매량을 기록한 해였고, 동시에 일본 만화계가 산정상을 밟았던 해였다.
1995년 초, ‘소년 점프’는 주간 발행 부수 653만 부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아마 이 기록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다. 드래곤볼, 슬램덩크, 유유백서가 이 기록의 트로이카 역할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잡지의 최고 발행 기록은 40만 부 정도였고, 만화 잡지로는 그나마 인기가 있었던 ‘아이큐 점프’가 20만부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소년 점프’의 653만 부라는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래곤볼, 슬랭덩크의 연재가 끝나면서 내가 인생의 낙(?)을 잃었듯이, ‘소년 점프’도 몰락의 길로 들어섰다.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데스노트 등이 나름 선전을 하였지만, 2006년 기준으로 ‘소년 점프’의 발행 부수는 295만 부로 추정되고 있다.(그나마 이것도 많이 올라간 수치이다) 발행 부수가 많이 떨어졌다곤 해도 이 숫자도 결코 적은 건 아니다. 옛날에 너무 잘 나가서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일 뿐, 결코 만만한 숫자가 아니다.
‘소년 점프’의 발행 부수가 1995년을 기준으로 하강곡선을 그린 것은, 물론 드래곤볼, 슬램덩크 같은 초인기 만화의 연재가 중단된 탓도 있지만, 가정용 비디오 게임기가 보편화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만화를 대체하는 새로운 오락 미디어가 속속 등장했던 것이다.
어쩌면 ‘점프 페스타(JUMP FESTA)’도 그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소년 점프’의 몸부림인지도 모르겠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이한 ‘점프 페스타’는 슈에이샤의 ‘주간 소년 점프’를 중심으로 한 만화, 애니, 게임의 축전이다. (참고로 ‘소년 점프’는 올해로 창간 40주년이다) 슈에이샤도 더 이상 만화 하나만 갖고는 밥벌이가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만화, 애니, 게임을 한 데 묶어서 행사를 하고 있다.
올해 ‘점프 페스타’는 12월 20일(토) ~ 21일(일), 치바현(千葉県)에 있는 마쿠하리 멧세(幕張メッセ)에서 열렸다. ‘마쿠하리 멧세’는 우리나라로 치면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킨텍스(KINTEX) 같은 곳이다. 참고로 마쿠하리 멧세 바로 옆에 치바 롯데 마린스 야구 경기장이 있다. 이승엽이 일본에 처음 진출했을 때 뛰었던 홈구장이다.
신문에서 점프 페스타 광고를 보고 처음엔 갈등을 좀 했다. 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치바현이라... 좀 멀군^^; 나는 도쿄의 서쪽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건 도쿄를 가로 질러서 한참 가야 한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 가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서, 일요일 새벽 알바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마쿠하리 멧세에 가려면 JR 케이요선(京葉線) 카이힌마쿠하리(海浜幕張) 역에서 내려 7~8분 걸으면 된다. 보통 도쿄역과 신키바(新木場)역에서 갈아타는 경우가 많다. 나는 도쿄역에서 케이요선으로 갈아탔는데 요금은 540엔이었다.
일요일 아침이니까 그래도 평일보단 사람이 적겠거니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내가 미처 생각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치바현에는 도쿄디즈니랜드가 있다. 마쿠하리 멧세에 가려면 케이요선 마이하마(舞浜) 역을 지나야 하는데, 바로 이 역이 도쿄디즈니랜드의 입구이다. 그래서 케이요선은 평일에는 출근하는 직장인 때문에, 휴일에는 도쿄디즈니랜드에 가려는 사람들 때문에, 언제나 사람들로 미어터진다.
전철역을 가득 메운 사람들을 보고 점점 마음속 갈등이 깊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갔다^^; 힘들게 힘들게 마쿠하리 멧세에 도착했는데, 이럴 수가... 웬 줄이 이렇게 길어?? 전시회장 내부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걷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작년 입장객수가 18만 7천 명이었다고 하는데 뻥이 아닌 것 같다.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인 40개 부스에, 26개 회사가 참여했다고 한다. 도쿄 지역에서 사는 이상, ‘수많은 인파’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인가 보다.
‘주간 소년 점프’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익숙한 캐릭터의 만화 주인공들이 많이 보였다. 그러나!! 만화는 미끼(?)였다. 실제 전시회의 내용 대부분은 게임 소프트 홍보였다. 비록 소년 점프에 연재된 만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것이라곤 하지만, 만화가 아니라 게임 전시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이제 대세는 만화에서 게임으로 기울었나 보다. 그것도 PSP, 닌텐도DS 같은 휴대용 게임기와 관련한 소프트가 주를 이루었다.
나는 조그만 화면이 싫어서 싸이월드도 미니홈피 버리고, 홈2를 쓰고 있는데, 일본 게임 시장은 ‘조그만 녀석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번 페스타에서도 그랬고, BIC CAMERA, 사쿠라야, 요도바시 같은 대형 전자상가를 가봐도 그렇고, 전철역에서 사람들이 들고 있는 걸 봐도 그렇고... 휴대용 게임기가 무척 많이 눈에 띈다.
고생한 것에 비하면 별로 얻은 것이 없는 ‘점프 페스타’ 여행이었지만, 여행이란 것이 원래 ‘갔다 온 이후’보다 ‘가기 전’이 더 즐거운 거 아니겠는가?
아마도 일본어를 공부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 흥미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번 점프 페스타를 봐도, 앞으로 상당 기간은 게임, 그것도 휴대용 게임의 시대가 될 것 같다. 우리나라도 게임이 돈이 되는 사업이란 점에 일찌감치 눈을 떠서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뛰어들고 있는 것으로 안다. 게임 제작을 배우러 일본에 오는 사람도 많고...
그러나 한 가지 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있다. 모든 미디어의 기본은 ‘종이’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성격이 너무 급해서 활자매체를 건너 띄고 바로 멀티미디어로 가려고 하는데, 이건 진부한 표현으로 모래 위에 성을 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새로운 콘텐츠의 창출을 지나치게 인터넷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렇게 창출된 콘텐츠는 그 질이 무척 낮고 오래가지 못한다. 책을 읽지 않고 애니메이션이나 게임에만 열중하는 사람은, 애니/게임의 훌륭한 소비자는 될 수 있을지언정, 크리에이터는 되기 힘들다. 잘 해야 제작사의 단순 노동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게임을 좋아하니까 게임만 열심히 하면 좋은 게임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크나 큰 착각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게임이 갖는 그 힘의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 잘 생각했으면 한다.
▲▼ 전시장 입구에서 블리치, 나루토의 주인공이 환영해 주고 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진 않지만, 올해 점프 페스타는 나루토가 대세였다. 가장 많이 보였던 만화 캐릭터는 나루토였다. 한쪽 코너에선 나루토 원작 만화가 '키시모토 마사시'가 직접 그린 병풍도 경매로 팔고 있었다. 스태프가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사진은... 없다.
▲▼ 역대 소년 점프 표지 모음
▲ 닌텐도DS에 열중하고 있는...
▲슈에이샤에는 창간 40주년이 되는 '소년 점프' 외에도 창간 15주년을 맞이한 'V 점프'와 창간 1주년을 맞이한'JUMP SQUARE'가 있다. 사진은 점프 스퀘어를 읽을 수 있는 코너...
▲ 카드 게임 대회
휴대용 게임기 외에도, 예상외로 카드 게임도 인기가 많았다. 많은 어린이, 청소년들이 카드 게임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본의 게임은 디지털만 있는 게 아니었다. 아날로그의 힘도 여전히 강력했다.
▲ 한 눈에 봐도... 여자 어린이들을 위한 코너임을 알 수 있을 듯...
▲ 이렇게 휴대용 게임기로 진행요원과 관객들이 함께 게임을 하는 코너가 무척 많았다.
▲ 아직도 건재하신... 스트리트 파이터 형님들
이제 연세도 꽤 되실텐데...^^;
▲ 걷기 조차 힘든 전시회장 내부... 사진 앞쪽에는 그나마 공간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출구이기 때문이다. 입구 쪽은 정말로 사람들이 많아서 걷기도 힘들다.
▲ 왼쪽이 치바 롯데 마린스 스타디움, 오른쪽이 마쿠하리 멧세
▲ 치바 롯데 마린스 스타디움
▲ 카이힌마쿠하리(海浜幕張) 역 앞에 있는 치바 롯데 마린스 조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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