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0일(水) 삿포로돔에서 열린 한일 축구 경기에서, 우리나라가 37년 만의 3골차 패배를 맛보았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 일본은 기쁨 속에서 각각 이 소식을 크게 다루었다...고 한다.
승자는 겸손하고, 패자는 말이 없어야 하는 법이거늘, 한국 언론은 일본을 이겨도 기고만장해지고, 일본에 져도 콧대를 세우는 나쁜 버릇이 있어 보인다. 일본에 큰 점수차로 대패하니까, 일본이 ‘위대한 축구 강국’ 한국에 이겼다고 축제 분위기라도 된 줄로 보도하고 있다.
분명 이번 승리로 일본이 들뜬 분위기가 된 것도 사실이고, 언론에서 크게 보도한 것 또한 사실이다. 문제는 ‘어느 정도의 비중’으로 생각하고 보도하고 있느냐이다. 대서특필이 맞긴 맞는데, 우리나라와는 무게감이 조금 다르다. 우리가 승리에 열광(또는 패배에 분노)하는 것만큼 일본이 관심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선 8월 11일자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조간...
1면에 축구 소식이 보이질 않는다. 1면에 실린 유일한 스포츠 관련 뉴스는 전국고교야구 경기 일정이다.(맨 오른쪽 중간쯤) 요즘 일본은 고교야구, 즉 코시엔(甲子園) 시즌이라 웬만한 스포츠 뉴스는 일본인들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이날 고교야구 기사는 5개면에 걸쳐 소개되었다. 반면 프로 야구에 달랑 1개면, 그리고 한일전 축구도 1개면이 할애되었다. 물론 아사히신문이 고교야구에 관심이 많은 신문이긴 하지만, 일본에서 요미우리 다음으로 발행부수가 많은 신문의 실정이 이렇다.
내가 요미우리신문까지 살펴 볼 여유가 없어서 구체적으로 말은 못하겠지만, 해당 신문사 홈페이지를 훑어봐도, 고교야구 관련 기사가 스포츠면의 메인 기사로 나온다.
▼ 일본 신문은 고교야구 기사를 이렇게 크게 보도한다.
8월 11일자 닛칸스포츠(日刊スポーツ) 신문...
1면에 한일전 결과가 크게 실렸다. 이 신문은 1면부터 4면까지 축구에 할애했다. 반면 프로 야구에 3개면, 고교야구에 1개면을 할애했다. 다른 주요 스포츠 신문도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큰 의미가 없을 것 같다.
일본의 스포츠 신문은 실질적으로 <야구신문>이고 <경마신문>이다. 웬만해선 1면에 축구 기사는 안 나온다. 1면은커녕 축구 기사 자체를 잘 안 써주는 경향이 있다. 그나마 닛칸스포츠가 야구 이외의 기사를 많이 다뤄주는 편에 속한다. 허나 이 신문 역시 프로 야구, 그 중에서도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편애하는 모습을 많이 보인다.
닛칸스포츠에 비해 발행 부수가 그렇게 많은 신문은 아니지만, 데일리 스포츠(Daily Sports)란, 아주 요상한(?) 신문이 있다. 이 신문은 절대로 1면에 축구 기사를 안 싣는다. 심지어 이 신문은 남아공 월드컵에서 일본이 첫승을 올렸을 때에도, 1면에 연예인(그리 유명하지도 않은) 결혼설 기사를 실었다. 월드컵 기간이라 딱히 내보낼 야구 뉴스가 없었고, 그렇다고 축구 얘기는 하기 싫고... 이건 대놓고 축구를 왕따시켜 보겠다는 고약한 심보이다.
한일전 3-0 패, 일본의 대서특필이란... 이런 모습이다.
상대방을 이겨 보겠다는 강한 열정을 갖는 것은 좋지만, 그 열정이 눈을 가리고 귀를 가려, 사실을 제대로 못 보는 우를 범하지 않았으면 한다. 독도, 동해, 역사교과서, 한일전... 일본 얘기만 나오면 무조건 열받고 화내고 흥분하는데, 그 ‘뜨거움’이 지금까지 문제 해결에 무슨 도움이 되었는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P.S.
나쁘게 보면 일본의 스포츠가 지나치게 야구(프로야구와 고교야구)에 편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처음에 나는 이걸 나쁘다고 생각했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꼭 나쁘다고 볼 수도 없다.
휴일에 마을을 걷다 보면, 아버지랑 어린 아들래미랑 야구공으로 캐치볼 하는 모습을 아주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엄마랑 어린 아들이랑 캐치볼 하는 것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한국에서 이런 광경을 거의 본 적이 없다. 야구에 편중되는 것은 분명 좋진 않지만, 야구를 통해서 부모 자식 간의 관계가 돈독해진다면야 그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듯...
일본 언론이 한낱 고교야구를 월드컵보다 더 크게 보도하는 것에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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