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문화

아이리스 : 한국어 원본을 능가하는 일본어 더빙판

페이퍼컴퍼니 2010. 4. 24. 13:51

 

결론부터 말하면 T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일본어 더빙판의 완성도가, 한국에서 방영된 원본보다 품질이 높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 방영분을 볼 때는 텔레비전, 아니 다운로드 받아서 봤으니까, 컴퓨터를 때려 부수고 싶은 충동을 많이 느꼈었는데, 놀랍게도 4월 21일(수요일, 9시) TBS에서 방영된 것은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한국 드라마를 일본에서 방영할 때 어떻게 편집하는지, 또 한국어 대사를 일본어로 어떻게 번역할까 궁금해서, 크게 기대하지 않고 봤던 것인데 의외로 괜찮았다.

 

겨우 1화 방영된 상황에서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일본드라마 수준이 말이 아닌지라, 나름대로 일본에서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첫 화 시청률도 좋았다. 평균 10.1%, 최고 시청률은 13.6%였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중 1, 2위를 다투는, NHK 사극 ‘료마전’과 TBS ‘신참(新参者)’의 시청률이 20% 조금 넘어서 차이가 많이 나지만, 다른 드라마의 시청률이 보통 한 자릿수를 기록하고 있고, 아이리스가 외국 드라마란 점을 감안하면 높은 수치이다.

 

아이리스 일본판을 보면서, 일주일에 2편씩 방영하고 중간 광고가 없는 우리나라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나는 이것이 좋은 제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요즘 그 생각이 흔들리고 있다. 일본판 아이리스가 재미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원본에 있던 군더더기 장면을 대폭 삭제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주일에 2편씩 방영했던 걸, 주 1회 방영에 맞춰 줄여야 했고(총 몇 회로 방영할진 모르겠지만), 거기에 중간 광고 들어갈 시간만큼 또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어 원본에 있던, ‘시간 때우기용’ 장면을 삭제하니까, 드라마 전개가 무척 빨라졌고 박진감이 살아났다. 한국 방영분은 ‘첩보 액션’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무척 지루했었다. 중간 광고 시간을 잠시 쉬는 시간으로 이용하니까, 오히려 집중이 더 잘 되었다. 다만, 일본 성우의 목소리에 위화감이 들긴 했지만, 그건 한국 배우의 목소리에 익숙한 한국인의 감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인의 감각은 다를 듯...

 

일본판이 아무리 편집을 잘 해도, 워낙 스토리가 부실해서 한계가 있어 보였지만, 그래도 둘 다 나쁜 한국판보단 낫다. 이건 아이리스가 기획 단계에서 많이 참고했다고 추측되는, 미국 드라마 [24]나 [프리즌 브레이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얘네들도 시즌 초반은 좋았지만, 뒤로 갈수록 스토리가 꼬이는 경향이 있었다. 앞에서 잔뜩 벌려놨던 이야기들이 뒤에서 수습이 안 되었다. 특히 [프리즌 브레이크]는 1, 2시즌에서 쌓아놓았던 명성을 3, 4시즌에서 다 말아 먹은 전과(?)가 있다.

 

아이리스의 NSS는 어딜 보나 [24]에 나오는 CTU이고, 요원들이 NSS를 ‘회사’라고 부르는 것과 정체불명의 비밀조직 ‘아이리스’는,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나오는 ‘컴퍼니’를 연상시킨다. [24], [프리즌 브레이크] 뿐만 아니라, 아이리스는 미국 드라마 여기저기서 조금씩 아이디어를 빌려(한 드라마에서 너무 많이 가져오면 표절이 되니까...) 무대만 한국으로 바꾸었다. 뭐 앞서가는 사람을 따라하고 본받는 건 나쁜 게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자.

 

아이리스 일본 버전을 보면서, 일주일에 2편씩 방영하고, 또 중간 광고가 없는 우리나라의 드라마 제작/방영 시스템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가위질’을 하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드라마가 되는 것을... 아이리스 한국 방영분을 봤을 때는, 이런 쓰레기 같은 드라마가 작년에 한국을 대표하는 드라마가 되었다니... 한탄밖에 나오질 않았었는데, 내 생각을 조금 바꿀 필요성을 느꼈다.

 

드라마 자체에 문제가 있기 보단, 방송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뭔가를 팔기 위한 상업적 목적의 광고라 할지라도, 시간을 들여 정성스럽게 만든 것과, 제한된 시간과 예산으로 남는 시간을 메우려고 허겁지겁 만든 것과, 과연 어느 것이 시청자에게 유익한 것인지 생각해 볼 점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드라마의 질을 떨어뜨릴 바에야, 우리나라도, ‘주 1회’ 방송하고 ‘중간 광고’를 허용하는 편이 좋아 보인다.


TBS 홈페이지에 있는 아이리스 소개글 중 이런 것도 있다.
   ‘아이리스’에서 보는 한국(1) 폭탄주, 정말로 있어?
그냥 재미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씁쓸한 기분이 든다. 한국의 음주 문화는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그렇다고, 일본 방송이 한국보다 건전하다곤 말 못한다. 우리나라 드라마에 음주 장면이 많은 것만큼, 일본 드라마에는 흡연 장면이 많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