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사회문화

일본천황 즉위 20년

페이퍼컴퍼니 2009. 11. 12. 22:32

학교 가는 길에 드문드문 일장기가 걸려있는 게 보였다.

 

‘어라~ 오늘이 무슨 날이지? 달력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는데...’

 

달력을 다시 살펴봐도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고, 또 일장기가 파출소(交番) 같은 공공기관에만 게양되어 있을 뿐, 일반 주택에는 걸려있지 않았다. 사태파악이 잘 안 되다가, 문득 아침에 일본 헤이세이(平成) 천황이 즉위 20년을 맞이했다는 뉴스를 본 게 떠올랐다. 천황탄생일(12월 23일)은 공식적으로 공휴일이지만, 즉위한 날(11월 12일)은 공공기관끼리 자율적으로(?) 기념하는 것 같다.

 

간만에 천황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날이었다. 일본은 서기와 함께 자체 연호를 함께 사용하는데, 올해는 헤이세이(平成) 21년이다. 사실 헤이세이 연호와, 생일파티 하라고 휴일 하나 늘려준 걸 제외하면, 일상생활에서 천황의 존재를 느끼기는 힘들다. 뭐랄까 일본에서 천황은 계륵(鷄肋) 같은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그다지 큰 소용은 없지만 막상 천황 제도를 없애자니 왠지 아까운... 잘 생각해보면 이렇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시스템도 드물기 때문에, 폐지하는 것이 꼭 좋다곤 볼 수 없다.

 

헤이세이 천황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 온화한 인품의 할아버지(!)로, 실제 대외활동도 그런 이미지에 걸맞게 하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얼 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일본인 중에서도 ‘천황의 역할’에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에선 나와 생각이 일치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점이 하나 있다. 나는 존재 자체에 의문을 품고 있으며 천황 제도의 폐지도 주요한 해결책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일본인은, 설령 천황의 역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의문을 갖는 사람들도 ‘존재’ 자체는 일단 인정하고 가는 경향이 있어 보인다. 존재 의미가 없으면 폐지해 버리면 무척 간단할 것을, 일단 존재하는 것 자체를 ‘불변의 진리’로 여기니까, 천황의 새로운 역할 찾기로 안 해도 될 고민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확 폐지해 버리는 게 정답이라고 하기도 힘들다. 긁어 부스럼 만든다고, 그냥 두면 별 일 없이 지나갈 일을 괜히 들쑤셔서 문제를 크게 만들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새로 출범한 민주당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의 취임식 모습이 생각난다. 분명 국민들의 선거를 통해 선출된 총리이건만, 취임식은 천황에게 직(職)을 하사받는 형식이었다. 아무리 의례적 행사라곤 하지만, 썩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럴러면 처음부터 천황에게 총리를 고르라고 하던가, 아니면 천황을 선거로 뽑을 것이지... 그런 면에선 우리나라 대통령 취임식이 훨씬 낫다. 미국 대통령은 성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하고(비록 헌법에 꼭 그렇게 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지만), 일본 총리는 천황에게 하사받는 모양새인 것에 비해, 최소한 대한민국 대통령은 종교와 왕, 이런 이미지를 벗고 글자 그대로 국민 앞에서 선서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천황에게는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특별한 경칭을 사용한다. 일본에선 일반적으로 남을 부를 때 ~상(さん)이라고 하며, 총리나 유명한 정치인(주로 남자)에게 ~씨(氏)를 사용하기도 한다. 아무튼 직장 상사나, 손님이나, 총리나 이름 뒤에 ~상(さん)이라는 경칭을 붙이면 된다. ~상(さん)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경칭이 ~사마(様)인데, 일상생활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종업원이 고객을 부를 때 ~사마(様)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지만, 그렇게 일반적인 모습은 아니다.

 

황태자/황태자비를 부를 때는 ~사마(様)라는 경칭을 사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욘사마 배용준은 황태자와 같은 급이다(농담임^^;) 그 다음이 바로 천황을 부를 때 사용하는 폐하(陛下)라는 경칭이다. 이 말은 오로지 천황과 그 황후(皇后)에게만 사용한다. 일본 정부 최고통치자인 총리도 옆집 아저씨랑 똑같이 ~상(さん)이라고 부르는데, 하는 일도 없는 천황에겐 총리보다 두 단계 높은 경칭을 사용한다. 외국인이 보기엔 넌센스이다.

 

하지만 이런 명칭을 둘러싼 넌센스는 일본에만 있는 게 아니다. 우리나라에선 이 ‘천황(天皇)’이란 단어가 못마땅해서 ‘일왕(日王)’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정치인이 ‘천황’이란 말을 사용하면, 매국노나 친일파 소리 듣기 십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짓거리(!)가 마음에 안 든다. 꼭 일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나는 기본적으로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주는 게 글로벌 시대의 기본 예의라고 생각한다. 일본에서 자기들 왕을 천황이라고 부르면, 우리도 그렇게 불러 주는 게 도리라고 생각한다. 외국에서 대한민국은 큰 나라도 아니면서 왜 나라 이름에 대(大)를 사용하느냐, 니들은 小韓民國이고, 대통령이 아니라 小統領이라고 해야 맞다고 따지면 기분 좋겠는가?

 

단어상 의미는 분명 황제(천황)가 왕(일왕)보다 상위 개념이지만, 요즘 시대에 왕이나 황제나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에선 이미 황제나 왕이란 개념이 국민들 의식 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런 용어에 복종이나 존경의 의미가 없다. 존경은커녕 구시대적 이미지마저 풍기는 그런 말이다. [일반명사]에 지나치게 연연해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것보단 일본에서 전개되고 있는 ‘천황의 역할’에 대한 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게 더 좋아 보인다. 일본이란 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존폐논의’가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찾는 논의라서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천황에 대한 일본인의 사고방식도 많이 바뀌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