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남(電車男, 2005년)
■ 방 영 : 후지TV(2005.07.07 ~ 2005.09.15 / 목요일 22:00)
■ 각 본 : 무토 쇼고
■ 연 출 : 타케우치 히데키, 쿠보다 테츠지, 코바야시 카츠히로
■ 주 연 : 이토 아츠시, 이토 미사키, 시라이시 미호, 토요하라 코스케
■ 방송편수 : 11부작
■ 음 악 : Face 2 fAKE
■ 오프닝 : Twilight - Electric Light Orchestra
엔 딩 : 世界はそれを愛と呼ぶんだぜ - 삼보 마스터
(세상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고)
■ 원 작 : (인터넷 소설) 나카노 히토리[中野独人]
2005년 여름, 그 해 드라마계를 평정한 아주 이상한(?) 드라마 하나가 출현했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탄생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전차남(電車男)이다.
원작 소설을 쓴 작가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中野独人(나카노 히토리)! 나카노(中野)는 일본에서 흔한 성이다. 그런데 独人(獨人)이라는 한자어를 ‘혼자’란 뜻의 ‘히토리’로 발음한다.(원래 이런 이름은 없다.) 즉, 나카노 히토리(中野独人)는 ‘인터넷 게시판에 모인 독신들’이란 뜻을 가진 가공의 이름이다. 인터넷에서 전차남을 완성시킨 사람이 한 명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만들어졌다.
2004년 봄, 투채널(2ちゃんねる; HTTP://WWW2.2CH.NET/2CH.HTML)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전차남이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투채널은 굉장히 세분화된 게시판(커뮤니티)이 존재하는데, 각 분야별로 오타쿠라 불리는 매니아들이 익명으로 활동하는 곳이다. 참고로 일본의 게시판과 우리나라 인터넷 게시판은 형태가 조금(혹은 많이) 다르다.
그런 투채널의 수많은 게시판 가운데, <毒男이 뒤에서 총 맞는 게시판 - 위생병 불러>라는 독특한 이름을 지닌 게시판이 있었다.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毒과 獨의 발음이 ‘どく(도쿠)’로 같다. 이 게시판은 이른바 毒男(=獨男)이라 불리는, 여자 복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만년 솔로 남성들이 모인 게시판이다. 그런데 이런 하릴없는 毒男들 중에서도 운 좋게 제짝을 만나 의기양양하게 커플 게시판으로 옮겨가는 사례가 있다. 神이라 불리는, 그 기적과 같은 업적을 이룬 극소수 중 한 명이 바로 ‘전차남’이다.
어느 날 毒男 게시판에 고개를 내민 전차남이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과거(!) 동지들에게 하면서, ‘전차남’이란 작품이 탄생하게 된다. 전차남과 毒男 게시판에 죽치고 있는 네티즌들이 주고받은 수많은 댓글을 바탕으로 책, 영화, 드라마가 탄생한 것이다. 인터넷 게시판에서 수다떨기는 이렇게 위대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도 있으니까, 앞으론 댓글 하나도 소중하게 써야겠다^^
영화는 드라마보다 한 발 앞서, 6월 4일 개봉하였다. 영화에서 전차남은 야마다 타카유키, 에르메스는 나카타니 미키가 맡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듬해 2006년 9월 7일 개봉했는데, 별다른 주목을 받진 못했다.
드라마 <전차남>에선 공교롭게도 성이 같은 이토 아츠시가 전차남을, 이토 미사키가 에르메스 역으로 나왔다. 이토 미사키는 전차남에서 처음으로 여자주인공 역을 맡았으며, 이 드라마의 성공으로 이후 많은 작품에서 주인공 역을 맡을 수 있었다. 이토 아츠시도 전차남의 성공으로 승승장구하긴 했지만, 외모가 워낙 거시기(?)하여 아주 조심스럽게(??) 주연급 배우를 맡았다.
개인적으로 드라마 보면서 남자 주인공 외모에 적응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얼굴만 놓고 보면 미녀와 야수 수준이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키도 10cm 정도 차이가 나서(아츠시 162, 미사키 171), 남자 주인공은 ‘비참한 솔로남’이 무엇인지 대사를 하기 전에 이미 몸으로 보여주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너무 뻔하고 흔해빠진 스토리였다. 능력 없고, 소심하고, 못생겼고, 돈도 없고, 애니메이션 오타쿠인... 한마디로 정상적인 정신세계를 가진 여자라면 기피해야 할 대상 1위인 이런 남자가, 전차 안에서 술주정꾼에게 괴롭힘을 당하던 미모의 여자를 구해준다는 내용! 엄밀히 말해서 구해준 것도 아니고, 우연히 구해준 상황이 되었을 뿐이다.(우리의 남자주인공에겐 그럴 능력조차 없다.)
여자는 전차 안에서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답례로 찻잔 세트를 남자에게 택배로 보낸다. 그것도 전화번호를 적어서!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남자는 너무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바로 컴퓨터를 켜고, 毒男 게시판에 죽치고 있는 동료들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전차남의 러브 스토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가 보내준 찻잔 세트가 ‘에르메스’라는 고급 브랜드라서 毒男 게시판에서 여자 주인공은 통칭 ‘에르메스’라고 불리게 된다. 에르메스는 실제로 고급 브랜드인데, 일본 드라마는 실제 브랜드 이름을 드라마에서 사용할 수 있고, 우리나라에 비해 직접 광고도 많다.
오타쿠를 소재로 한 작품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전차남의 완성도는 이전의 여느 작품들을 훨씬 능가한다. 그 독창성과 세련된 연출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키보드를 두드려서 작성되는 글자를 화면에 담아내는 것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오히려 긴장감까지 주었다. 화려한 동영상의 영역인 드라마에서 ‘문자’를 사용해서 긴장감과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드라마 특유의 과장됨이 있어서 그렇지, 지금 이 시간에도 만화, 애니, 플라모델에 푹 빠져 사는 전국의 수많은 족속(?)들에게 많은 공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오타쿠를 소재로 한 드라마이기 때문에, 이 드라마들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플라모델에 대한 상식이 필요하다. 물론 그런 걸 몰라도 드라마 보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알고 보면 훨씬 더 좋다. 예를 들어 홍길동전이나 춘향전은 조선의 역사를 몰라도 보고 즐기는 것 자체는 가능하다. 하지만 역사를 알고 보면, 많은 것을 더 느낄 수 있다. 전차남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기동전사 건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주인공 방을 화려하게 장식한 피겨 모델은 대부분 건담 플라모델이다. 건담은 현재까지 12편에 달하는 TV 시리즈와 그 외 수많은 극장판, OVA가 만들어졌다. 2008년 2월 현재도 <기동전사 건담 더블오>가 방영중이다. 주인공 방에 있는 건담 플라모델은 대부분 1979년에 방영된 최초의 TV 시리즈이다. 1979년에 방영된 첫 번째 시리즈의 제목이 ‘기동전사 건담’인데, 이후 제작된 수많은 시리즈의 원조격에 해당하기 때문에 ‘퍼스트 건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인공의 책장에는 건담 로봇이, 침대에는 건담에 등장하는 ‘하로’ 모양의 동그란 쿠션이 놓여있다. 드라마 중반 이후에 주인공이 오타쿠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방황하는 장면이 나온다. 드디어 결심을 굳히고 방안에 있는 건담 모델을 박스에 담아 강에 떠내려 보낼 때, ‘오뎃사 작전에 참가했다’는 문구가 나온다. 이건 퍼스트 건담에 나오는 중요한 작전명이다. 그리고 떠내려가는 박스를 향해 일동 경례!
그런데 박스를 떠내려 보내고, 돌아오는데 다리 위에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복장의 사람을 만난다. 주인공이 ‘아무로?’라고 의아스런 눈빛으로 혼잣말을 하는데, 건담 주인공 이름이 ‘아무로 레이’이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오타쿠 생활 청산하려고 건담 모델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상대방은 다리 위에서 ‘마틸다’란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고 있었다. 마틸다는 퍼스트 건담에 잠깐 등장했던 인물인데, 바로 ‘오뎃사 작전’ 직전에 아무로 레이 등을 구하며 전사한다. 이 짧은 장면이 갖는 깊은 의미는 건담을 안 본 사람에겐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1974년에 방영된 마츠모토 레이지 감독의 <우주전함 야마토>의 웅장한 주제가가 주요 장면마다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역시 야마토를 안 본 사람은 이 배경음악이 왜 이 장면에서 사용되는지 잘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건담과 야마토를 본 사람들에겐, 전차남을 보면서 애니메이션의 여러 장면들이 겹쳐 보일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 오타쿠 정도 되는 사람들은 대부분 건담과 야마토를 알고 있고, 꼭 오타쿠가 아니더라도 30대 전후의 남자들은 이 두 애니메이션을 알고 있다.
뿐만 아니라 패러디도 많이 나온다. 전차남이 실종되었을 때 게시판의 누군가가 ‘秋葉の中心で電車をさけぶ 아키바의 중심에서 전차를 외치다’라고 말하는데, 바로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의 패러디이다. 이런 기발한 패러디는 전차남의 장점이기도 하지만 단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패러디한 것의 원작을 모르는 사람에겐 그만큼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전차남이 일본이란 나라를 벗어나서 인기를 끌기 어려운 점이기도 하다.
아쉬운 점도 남았는데, 그건 본편 방송 때문이 아니라 후속편 때문이다. 본편 11화는 멋지게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본 방송의 인기에 편승하여 이후 방영된 <전차남 - 또 하나의 최종회 스페셜 電車男 もう一つの最終回スペシャル>과 <전차남 디럭스 최후의 성전 電車男DELUXE 最後の聖戦>은 차라리 만들지 않는 편이 좋았다. 스페셜 편은 보통 본방송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서 관례적으로 만든다손 치더라도, 1년 뒤에 방영한 <디럭스 최후의 성전>은 아쉬움이 컸다. 쓸데없이 해외 로케이션까지 해가며 꽤 많은 제작비를 쏟아 부은 것 같지만 재미는 없었다. 전차남은 딱 본방송 11부에서 끝냈어야 했다.
<전차남>은 여러 모로 재미있고 참신하고 괜찮은 드라마였다.
▲ <전차남>에 등장하는 오타쿠들이 푹 빠져 있는 미나 캐릭터이다. 주인공 방에 없을리 없다. 원래 가공의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전차남의 인기에 힘입어 실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 2007년 1월 13일부터 후지 TV에서 <월면토병기 미나>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지만, 작품성은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
▲음... 에르메스 찻잔에 새겨진 저 선명한 글씨...
▼ 독남 게시판에 죽치고 있는 수많은 궁상들...
▼ 오타쿠의 성지(聖地) 아키하바라 지하철 푯말
※이미지 출처 : 동영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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